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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가지 다르다! 이이번달 추천!@ 너만알기! 안데르센 동화 만들기홍주 ㅋㅋㅋㅋㅋ

by vs7wf28t86yi 2020.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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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의 동화전집은 《동화와 이야기》라는 제목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동화 이외에 청소년들을 위한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래 언덕의 이야기》, 《얼음 아가씨》, 《푸시케》 등이 후자에 속하며, 역작이기는 하나 이해하기 어렵다.
동화에는 민화(民話)를 재구성한 것과 순수 창작이 있으나 전자는 그 수가 적고, 그것도 주로 초기에 씌어져 최초의 동화집에서는 4편 중 3편이 그 계통이었지만 점점 창작 동화에 주력하게 되었다.
대표작은 《인어공주》, 《벌거벗은 임금님》, 《성냥팔이 소녀》, 《미운 오리 새끼》, 《빨간 구두》, 《눈의 여왕》 등이 있으며, 또 《저 여자는 쓸모없습니다》와 같이 박복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빗대어 쓴 특이한 작품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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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이 포스팅은 안데르센 동화 을 조사하여 알아보았는데요.안데르센 동화마을마음에 좀 드시나요?오늘 하루도 보람찬 하루 되시구요.이상 마리꾸 인사드립니다.씨유레이러~안뇽~

굿모닝!먀리뀨 이지요.영광스럽게도 마이 BLOG를 놀러와주셔서 감사해요오.:)날이 맑은게 넘 즐거워요.이웃님들~ 오늘 무슨일 하며 보냇나요? :-]이제 얘기할 주제는인데요.이제 준비되었으면 남들보다 빠르게 시작해보도록 할게요. 고고씽 ^^

오맞다 사실 저동 #이홍주 #이홍준소아과 #이홍주 에 대해서 진짜 궁금했었는데요이웃님들 검색에 저도 한번더 찾아보게되었어요.그럼 정말 시작해 볼까요?구독자분들의 관심에 힘입어서바로 이홍주간찰 시작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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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곳은 고(故) 영의정 이공(李公)의 묘소입니다.
공의 휘(諱)는 홍주(弘胄), 자(字)는 백윤(伯胤), 호(號)는 이천(梨川)인데 국성(國姓)인 이씨(李氏)로서 공정 대왕(恭靖大王, 정종)의 6대손입니다.
이금정(李金丁)은 명산수(明山守)로 명선 대부(明善大夫)에 추증(追贈)되었는데 고조(高祖)이고, 이옥형(李玉荊)은 하양영(河陽令)으로 승헌 대부(承憲大夫) 하양군(河陽君)에 추증되었는데 증조(曾祖)입니다.
조(祖) 이주(李珠)는 파천 부령(坡川副令)으로 가덕 대부(嘉德大夫) 파천군(坡川君)에 추증되었으며, 고(考) 이극인(李克仁)은 간성 군수(杆城郡守)로 증 영의정(領議政)이고, 비(妣) 창원 유씨(昌原兪氏)는 증 정경 부인(貞敬夫人)으로 병절 교위(秉節校尉) 증 참판(參判) 유환(兪煥)의 딸입니다.
공은 가정(嘉靖) 임술년(壬戌年, 1562년 명종 17년)에 출생하였습니다.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는데,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선조(宣祖)의 행조(行朝)에 나아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갑오년(甲午年)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에 선발되어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고,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을 겸임합니다가 임기가 만료되자 예조 좌랑으로 전보된 뒤에 다시 병조로 자리를 옮겼다.
이 당시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 이 상공(李相公)이 도체찰사가 되어 공을 종사관으로 등용하였습니다.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와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으며,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에 정랑으로 승진되었는데, 재상 정 송강(鄭松江, 정철(鄭澈))의 아들이 견척(譴斥)당한 일에 연좌되어 강서 현령(江西縣令)으로 나갔다가 이듬해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서용되어 성균 사예(成均司藝) 겸 편수관(編修官)에 복직되었다.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에 평양 서윤(平壤庶尹)으로 나갔는데, 조정에 그 치적이 으뜸이라고 보고되어 표리(表裏, 안팎옷감) 한 벌을 하사받았고,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에 질병을 아뢰어 돌아왔다.
이듬해 경술년(庚戌年)에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체찰사의 추천으로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되어 임기를 채우고 돌아왔다.
갑인년(甲寅年, 1614년 광해군 6년)에는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나가 치적을 이루어 표리 한 벌을 하사받고, 얼마 후 공무로 인해 견책을 받아 파직되어 산직(散職)으로 물러났다.
정사년(丁巳年, 1617년 광해군 9년)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곧 전라 감사가 되었는데, 때마침 흉악한 논의가 거세게 일어나 장차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기 위해 조정 관리들의 의논을 수합하자, 공은 이를 개탄하여 초안을 잡아놓고 대기하였으나 의논을 수합하는 범위가 지방 관리에게까지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중지하였습니다.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에 돌아와 서추(西樞)에 제수되었다가 형조 참의로 자리를 바꿨다.
이때 평안도 관찰사가 의주성(義州城)을 축조하는 공사가 준공되었다 하여, 전ㆍ현임의 부윤을 다같이 표창하였는데, 공이 사실 그 공사를 착공하였기 때문에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더하였습니다.
기미년(己未年, 1619년 광해군 11년)에는 사신의 명을 받들고 연경(燕京)에 다녀왔고, 신유년(辛酉年, 1621년 광해군 13년)에는 동지중추 겸 부총관(副摠管)으로 있습니다가 병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자리를 옮겼으며, 얼마 후 함경 감사가 되었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지금의 성상께서 반정하여 임금이 되었을 때, 그대로 유임시켰다가 곧 예조 참판으로 불러 서울로 돌아오던 도중에 도승지로 바꿔 제수하였습니다.
이 당시 좌승지의 자급이 공보다 높아 임금이 공에게 특별히 한 자급을 올려줬는데, 이는 보기드문 은전이었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 이괄(李适)의 반란 때는 임금의 행차를 호위한 공으로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승진시키고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겸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를 제수하자, 공은 군사에 대하여 익숙지 못합니다고 사양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경(卿)은 행검이 청백하고 도량이 크고 깊다.
청백하면 충분히 수많은 대중을 다스릴 수 있고 도량이 크고 깊으면 충분히 인심을 제어할 수 있으니, 도원수의 임무를 경이 아니면 누가 맡겠는가?” 하였습니다.
드디어 길을 떠나 원수부(元帥府)를 관서(關西)에 개설하였습니다가 이듬해 을축년(乙丑年)에 극력 사직하여 다시 조정으로 소환되었다.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에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는 특별히 도승지에 제배하였으니, 이미 품계를 올렸던 관례에 의한 것이었다.
이듬해 정묘년(丁卯年)에 우참찬 겸 의금부사에 제수되었다.
금(金)나라 군대가 침입했을 때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자전(慈殿, 인목대비를 말함)을 호위하고 먼저 강도(江都)로 들어갔으며, 적군이 물러간 다음 명나라의 황감군(黃監軍, 황손무(黃孫茂))을 가도(椵島)에서 접대하고 돌아올 때 폭풍을 만나 배가 부서져 며칠 동안 매우 위급한 상황을 넘기고 생명을 건졌으므로 사람들은 천신(天神)이 돌보았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대사헌에 제수된 뒤에 체직되어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에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습니다.
이듬해 기사년(己巳年)에 1년간 경기 감사를 지낸 뒤에 병조 판서가 되고, 지돈녕부사ㆍ대사헌ㆍ예조 판서를 역임하였습니다.
이 당시 한창 (정원군(定遠君, 인조의 생부)의) 추숭(追崇)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공은 사직하기를, “신은 비록 학문이 어둡지만 나름대로의 소견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에게 강제로 본직을 맡겨 지시하는 것은 또한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 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대사헌으로 있을 때 이미 그 일을 반대하였기 때문인데, 임금이 준엄한 분부를 내려 종백(宗伯, 예조판서의 별칭)을 다시는 차출하지 말라는 명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에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고 1년이 지난 뒤에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며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는데,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시책(諡冊) 글씨를 썼기 때문입니다.
좌참찬(左參贊)에 제수된 다음 계유년(癸酉年, 1633년 인조 11년)에 또 병조 판서가 되었다.
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 12년)에는 창경궁(昌慶宮) 보수공사를 감독하였습니다 하여, 숭록 대부(崇祿大夫)로 승진시키므로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판돈녕부사로 옮긴 다음 또 예조 판서가 되었는데, 종백의 자리에 이때까지 세 번 제수되었으며, 경연(經筵)ㆍ춘추(春秋)ㆍ빈객(賓客)과 판의금부사 등 관직을 항상 겸임하였습니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 봄에 이조 판서를 지내고 여름에 우의정이 되었다.
이해 겨울 12월에는 임금을 호위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으며, 여러 차례 왕명을 받들고 적진으로 갔는데, 산성에서 나오는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그들의 뜻을 받아주지 않았고, 어느날 임금이 산성을 나가는 계책을 가지고 묻자 공은 그것의 옳지 않음을 극력 아뢰었다.
이듬해 정축년(丁丑年) 정월에 사태가 위급해져서 춘궁(春宮,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말함)이 장차 심양(瀋陽)으로 들어가게 되고 대신들도 함께 따라가게 되어 있었으나, 이때 공의 나이 70세가 넘었으므로 당시의 여론이 너무 늙어 그 대상에서 빼자고 하여 임금의 허락을 얻고 영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도성으로 돌아온 뒤에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여러 번 청하였고 또 스스로 인책하기를, “불행하게도 망국 대부(亡國大夫)에 가깝습니다.
” 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가을에는 말미를 받아 묘소를 참배하고 그대로 선산 아래 머물러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므로,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임금의 부탁하는 말이 한층 더 간절하여 마지못해 일어나 조정에 나아갔다.
그러다가 금년(戊寅年, 1638년 인조 16년) 5월부터 다리병의 증세가 심각해져 사직소를 20여 차례나 올리자, 임금이 비로소 허락하고는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문하고 의원과 약물을 계속 보내왔다.
7월 13일 정침(正寢)에서 졸(卒)하였는데, 곧 숭정(崇禎) 11년으로 춘추는 77세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매우 높아 법도에 구차히 얽매이지 않았지만 평소의 언행은 저절로 도리에 가깝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남들을 대할 때는 하루종일 똑바로 앉아 조금도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기풍이 온화하면서도 엄격하여 기쁘고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나 일에 부딪히면 꿋꿋하고 당당하여 함부로 범접할 수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정직합니다고 일컬었다.
옷차림새는 검소하였고 생활이 보잘것없어, 오두막집에 부들로 만든 방석에 앉았었지만 그저 태연하였습니다.
정자나 초서를 잘 쓴 것으로서 말합니다면 공에게 있어서야 대수롭지 않은 일로서 천부적으로 타고난 솜씨였다.
일찍이 빈객(賓客)으로 있을 때 세자가 무일편(無逸篇, 서경(書經)의 편명)을 써서 올리라고 하였는데, 때마침 공이 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세자는 공의 병이 나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써서 올리라고 하였습니다.
문묘(文廟)의 묘정비(廟庭碑)를 새로 세우면서 그 비문을 쓸 인물을 당대의 명필로 선발하여 결국 공이 선발되었으나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에게 사양하자 임금은 공이 쓰도록 명하였습니다.
전후에 걸쳐 정승 자리에 앉은 기간은 1년 남짓하였으나 그 절반은 병으로 신음하였고, 벼슬길에 들어간 뒤로 현직(顯職)에 제수되면 그때마다 사양하여 오랫동안 앉아 있은 적이 없었으며, 영중추부사로 별세하였습니다.
청나라에서 우리나라에 군사를 징발하는 조치가 있었을 때 공은 말하기를, “차라리 나라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망정 결코 따를 수 없습니다.
”고 하였는데, 마침내 오늘과 같은 현상을 보지 않고 훌쩍 영원히 떠나버렸으니, 한편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공이 졸하던 날 내가 그때 달려가 살펴보았는데, 병세가 이미 위급해져 숨이 거의 끊어질 듯하면서도 서로 대화를 나눴고 말마디가 하나도 어긋나지 않았으며, 졸하기 몇 시각(時刻) 전에 옆 사람에게 머리를 빗질하게 한 뒤에 스스로 상투를 틀었다.
나이가 80이 가까웠고 병을 앓은 지 오래되었으나 졸할 임시에 여유 만만하여 이와 같이 정상적인 자세를 유지하였으니, 평소에 몸가짐을 어떻게 했던가를 또한 알아볼 수 있습니다.
9월에 양주(楊州) 내송산(內松山) 선영의 곁에 장사지냈습니다.
배위는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증 정경 부인(貞敬夫人)인데, 부사(府使) 증 이조 참판 구효연(具孝淵)의 딸입니다.
자애롭고 청순한 자질로 첩들을 너그럽게 대하였으며, 공보다 9년 먼저 졸(卒)하였습니다.
아들 이헌방(李憲邦)은 감찰(監察)을 지냈고, 딸은 찰방(察訪) 민성임(閔聖任)에게 시집갔다.
측출(側出)에 아들 딸 하나씩 있는데, 아들 이안방(李安邦)은 생원이고, 딸은 생원 이원빈(李元賓)에게 시집갔다.
이헌방은 일찍 죽어 적자(嫡子)가 없고 서출에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 이지백(李知白)은 진사이고, 장녀는 대사성(大司成) 이행원(李行遠)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장선윤(張善潤)에게 시집갔다.
이원빈은 1남 2녀를, 이지백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직 모두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행실은 방정하고 곧았으며 성품은 관대하되 위엄이 있었으므로, 명망이 한 시대에 대단하여 좋은 평판 돌아간 바 되었네.
장수가 되고 정승이 되었으니 지위와 권한이 더욱더 무거웠네.
청백(淸白)한 미성과 얼굴빛을 대단찮게 여겼으나 의리를 보면 용감